반려동물을 가족으로 본다는 말, 그게 왜 이렇게 슬플까요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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나는 지금 고양이 두 마리와 함께 살고 있다. 둘 다 유기묘였다. 한 마리는 비 오는 날 골목 쓰레기통 옆에서 울고 있던 아이였고, 다른 한 마리는 공사장 근처에서 구조된 아기 고양이였다. 처음 데려왔을 땐 몸무게 600g도 안 됐는데, 지금은 둘 다 제법 몸집도 크고 건강하게 자랐다. 밥도 잘 먹고, 잘 놀고, 잘 잔다. 그러니까, 고양이로서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고 믿고 있다.
그런데 이상하게도, 가끔 이 아이들을 보면서 마음이 찢어질 듯이 아플 때가 있다.
하루는 일하다가 퇴근이 늦어졌고, 밤 11시쯤 집에 들어왔는데 고양이 한 마리가 현관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. 문 여는 소리를 듣고 먼저 달려나온 거겠지. “미안해~ 엄마 늦었지?”라고 말하면서 안아주는데, 그 눈빛에서 묘한 울컥함이 올라왔다.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생명체가, 그저 기다리는 일밖에 할 수 없다는 게 그토록 미안하고 슬플 수 있더라.
고양이와 살다 보면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지쳤던 마음이 조금씩 회복된다. 누군가가 날 조건 없이 반겨주고, 말없이 다가와 옆에 앉아주고, 내가 우울할 때 옆에서 자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된다. 말 그대로 ‘가족’이다. 그런데 그 가족의 수명이 인간보다 훨씬 짧다는 걸 알고 있는 나는 매일이 불안하다. 하루라도 밥을 안 먹으면, 토를 한 번만 해도, 급하게 병원에 데려가야 하는 건 아닌지 불안해진다.
이 아이들은 나에게 웃음을 주는 존재이기도 하지만, 동시에 늘 마음 한쪽을 아릿하게 만드는 존재다. '이 아이들이 먼저 떠나면 나는 과연 멀쩡할 수 있을까?'라는 생각을 할 때마다, 내가 왜 이런 고통을 감수하면서까지 반려동물을 키우기로 했을까 자문하게 된다.
하지만 답은 정해져 있다. 같이 살기로 한 날부터, 책임도, 사랑도, 슬픔도 함께 감당하기로 했으니까.
최근 뉴스를 보면 유기동물 문제가 더 심각해졌다고 한다. 코로나 시기에 반려동물 입양이 급증했지만, 다시 사회가 정상화되면서 버려지는 동물도 크게 늘었다고 한다. 반려동물이 장난감이 아니다, 가족이다, 라는 말을 우리는 너무 많이 들어서 그 말조차 이제는 피로하게 느껴질 정도다. 그런데 그 말을 피곤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아마도 진짜로 동물을 가족처럼 대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일지도 모른다.
동물은 말을 못 한다. 그래서 우리는 이 아이들이 뭐가 아픈지, 뭘 원하고 있는지 늘 추측해야 한다. 기분이 안 좋아 보이면, 사료가 입에 안 맞는 건가? 화장실 모래가 마음에 안 드는 건가? 아님 아파서 그런가? 모든 가능성을 떠올리며 마음 졸이게 된다. 가족 중 누군가가 아프면 걱정되듯이, 반려동물도 그렇다.
가끔 주변 사람들은 내게 “혼자 사는데 동물 두 마리 키우기 힘들지 않아?”라고 묻는다. 물론 힘들다. 병원비도 만만치 않고, 집에 뭔가 냄새가 나진 않을까 신경도 쓰이고, 여행도 못 가고, 이사할 때마다 집부터 고르고. 하지만 그 모든 불편을 감수하고도 이 아이들이 있어줘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.
혼자 사는 사람들에게 반려동물은 단순한 '동물'이 아니다. 말 그대로 삶의 구조다. 이 아이들이 있기에 아침에 눈을 뜨고, 출근 후엔 집에 돌아가야 할 이유가 생기고, 하루의 끝에 안도할 수 있는 대상이 있다는 것. 그건 생각보다 큰 힘이다.
이제 곧 우리 첫째 고양이는 8살이 된다. 고양이의 평균 수명을 생각하면, 인생의 중턱을 넘고 있는 셈이다. 그래서 요즘은 자주 안아준다. 귀찮아해도 꾹 안고, 배를 만지고, 눈을 마주치고 속삭인다. “우리 오래오래 같이 살자.” 이 말이 기도처럼 흘러나온다.
나는 이 아이들의 생을 온전히 함께할 자신이 있다. 끝까지. 아플 때 병원도 데려가고, 비용이 얼마나 들든 감당하고, 시간이 부족해도 안아주고, 마지막을 함께해줄 용기까지도 준비하려고 노력 중이다.
반려동물을 가족이라 부르는 일은, 사랑의 이름이면서 동시에 책임의 이름이기도 하다. 그리고 나는 그 책임을 다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.
그런데 이상하게도, 가끔 이 아이들을 보면서 마음이 찢어질 듯이 아플 때가 있다.
하루는 일하다가 퇴근이 늦어졌고, 밤 11시쯤 집에 들어왔는데 고양이 한 마리가 현관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. 문 여는 소리를 듣고 먼저 달려나온 거겠지. “미안해~ 엄마 늦었지?”라고 말하면서 안아주는데, 그 눈빛에서 묘한 울컥함이 올라왔다.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생명체가, 그저 기다리는 일밖에 할 수 없다는 게 그토록 미안하고 슬플 수 있더라.
고양이와 살다 보면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지쳤던 마음이 조금씩 회복된다. 누군가가 날 조건 없이 반겨주고, 말없이 다가와 옆에 앉아주고, 내가 우울할 때 옆에서 자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된다. 말 그대로 ‘가족’이다. 그런데 그 가족의 수명이 인간보다 훨씬 짧다는 걸 알고 있는 나는 매일이 불안하다. 하루라도 밥을 안 먹으면, 토를 한 번만 해도, 급하게 병원에 데려가야 하는 건 아닌지 불안해진다.
이 아이들은 나에게 웃음을 주는 존재이기도 하지만, 동시에 늘 마음 한쪽을 아릿하게 만드는 존재다. '이 아이들이 먼저 떠나면 나는 과연 멀쩡할 수 있을까?'라는 생각을 할 때마다, 내가 왜 이런 고통을 감수하면서까지 반려동물을 키우기로 했을까 자문하게 된다.
하지만 답은 정해져 있다. 같이 살기로 한 날부터, 책임도, 사랑도, 슬픔도 함께 감당하기로 했으니까.
최근 뉴스를 보면 유기동물 문제가 더 심각해졌다고 한다. 코로나 시기에 반려동물 입양이 급증했지만, 다시 사회가 정상화되면서 버려지는 동물도 크게 늘었다고 한다. 반려동물이 장난감이 아니다, 가족이다, 라는 말을 우리는 너무 많이 들어서 그 말조차 이제는 피로하게 느껴질 정도다. 그런데 그 말을 피곤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아마도 진짜로 동물을 가족처럼 대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일지도 모른다.
동물은 말을 못 한다. 그래서 우리는 이 아이들이 뭐가 아픈지, 뭘 원하고 있는지 늘 추측해야 한다. 기분이 안 좋아 보이면, 사료가 입에 안 맞는 건가? 화장실 모래가 마음에 안 드는 건가? 아님 아파서 그런가? 모든 가능성을 떠올리며 마음 졸이게 된다. 가족 중 누군가가 아프면 걱정되듯이, 반려동물도 그렇다.
가끔 주변 사람들은 내게 “혼자 사는데 동물 두 마리 키우기 힘들지 않아?”라고 묻는다. 물론 힘들다. 병원비도 만만치 않고, 집에 뭔가 냄새가 나진 않을까 신경도 쓰이고, 여행도 못 가고, 이사할 때마다 집부터 고르고. 하지만 그 모든 불편을 감수하고도 이 아이들이 있어줘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.
혼자 사는 사람들에게 반려동물은 단순한 '동물'이 아니다. 말 그대로 삶의 구조다. 이 아이들이 있기에 아침에 눈을 뜨고, 출근 후엔 집에 돌아가야 할 이유가 생기고, 하루의 끝에 안도할 수 있는 대상이 있다는 것. 그건 생각보다 큰 힘이다.
이제 곧 우리 첫째 고양이는 8살이 된다. 고양이의 평균 수명을 생각하면, 인생의 중턱을 넘고 있는 셈이다. 그래서 요즘은 자주 안아준다. 귀찮아해도 꾹 안고, 배를 만지고, 눈을 마주치고 속삭인다. “우리 오래오래 같이 살자.” 이 말이 기도처럼 흘러나온다.
나는 이 아이들의 생을 온전히 함께할 자신이 있다. 끝까지. 아플 때 병원도 데려가고, 비용이 얼마나 들든 감당하고, 시간이 부족해도 안아주고, 마지막을 함께해줄 용기까지도 준비하려고 노력 중이다.
반려동물을 가족이라 부르는 일은, 사랑의 이름이면서 동시에 책임의 이름이기도 하다. 그리고 나는 그 책임을 다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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